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예론
한빛비즈
번역서
절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문예론’
이야기의 아름다움 VS 문체의 아름다움
일본의 천재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문예론이 담긴 수필 모음집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이 출간됐다. 소설 외에도 수필과 평론, 소품 등을 다수 발표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청아한 문예’라며 특히 수필을 사랑했다. 이 책은 그중에서 그의 문예론, 창작 철학이 담긴 수필 70여 편을 골라 엮었다. 「라쇼몽」 등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은 국내에 여러 권 소개됐으나 문예론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의 일상, 그리고 당대 함께했던 문인들의 이야기가 곁들여지면서 문학적 재미를 더한다.
이야기는 일본의 대표적인 탐미주의 작가인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문예론 논쟁에서 출발한다. 소설의 재미는 구조적 아름다움에 있다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예술의 가치는 예술 그 자체에 있다는 예술지상주의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대립이다. 여기서 아쿠타가와는 줄거리보다 시적 정신이 더 중요함을 거듭 주장한다. 아쿠타가와 문예론의 핵심 논제인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는 소설’ 그리고 ‘시적 정신’이라는 키워드의 등장이다.
문체의 아름다움은
눈과 마음의 정확한 표현으로부터 나온다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제정된 것으로,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순수문학상이다. 일반적으로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은 문예적으로 가치가 높다는 평을 받는다. 아쿠타가와가 완성한 문체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의 문체는 우선 눈과 마음으로 파악한 것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아울러 예술작품으로서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문체의 아름다움을 획득한 일이었다. 상당수의 작가들이 정확함을 얻기 위해 문체의 아름다움을 희생시키거나 아름다움을 위해 문체의 정확성을 희생시키는 동안, 그는 문체의 아름다움과 정확함을 한꺼번에 이룩했다. 또한 그처럼 한 사람의 문체에서 회화적인 아름다움과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얻기란 쉽지 않다. 그의 문체에는 눈에 호소하는 아름다움과 귀에 호소하는 아름다움이 둘 다 존재한다. 이 아름다움은 언어의 형태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가 미묘하게 융합되면서 생성됐다. 이런 특색은 문체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에서 드러난다. _해설 300~301쪽
이야기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
1927년 2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이야기의 재미와 예술성이 별개의 문제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에 탐미주의 작가인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줄거리가 주는 재미를 없애는 건 소설이라는 형식이 가진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되묻는다. ‘이야기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이 가장 우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장 순수한 소설로는 부족함이 없다고 답하는 아쿠타가와. 훗날 ‘이야기 비판적’인 일본 문학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이 논쟁은 아쿠타가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결국 끝을 맺지 못했다.
소설의 가치를 결정짓는 요인은 이야기의 길고 짧음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야기가 기발한지 아닌지는 평가 범위 밖의 문제다. 알다시피 다니자키 준이치로 씨는 기발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많은 소설을 썼고, 그중 몇 편은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으리라. 다만 그 생명력이 꼭 이야기의 기발함에서 오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있든 없든 작품의 가치와 상관없다. 앞서 말했듯 이야기 없는 소설 혹은 이야기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이 우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소설도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이야기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이 그저 신변잡기를 묘사한 것만은 아니다. 모든 소설 가운데 가장 시에 가까운 소설이며, 산문시보다는 소설에 가깝다. 세 번 반복하는데 이야기 없는 소설이 우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통속적인 흥미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가장 순수한 소설이다. _본문 90~91쪽
모든 문예는 시적 정신을 갖춰야 한다
아쿠타가와가 한창 작품 활동에 매진했던 당시 일본 문단에는 ‘사소설(私小說)’이 유행했다. 사소설은 작가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그린 일본 특유의 소설 형식이다. 아쿠타가와와 함께 나쓰메 소세키의 문하생이었던 구메 마사오가 사소설을 산문의 근본으로 평한 데 반해 아쿠타가와는 사소설을 순수한 산문으로 볼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이야기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만들고, 예술가의 가치를 정하는 ‘시적 정신’이야말로 아쿠타가와가 평생 추구했던 ‘정신적 혁명’인지도 모른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씨를 만나 논박을 벌일 때 “자네가 말하는 시적 정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의 시적 정신은 가장 넓은 의미의 서정시”라고 답하자 다니자키 씨가 말했다. “그런 것이라면 어디든 있지 않은가?” 그때도 말했지만 나 역시 시적 정신이 어디든 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마담 보바리』도 『햄릿』도 『신곡』도 『걸리버 여행기』도 모두 시적 정신의 산물이다. 사상이 문예 작품에 깃들려면 반드시 시적 정신이라는 신성한 불을 통과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 불길이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정진하는 힘이 주는 수확은 의외로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성한 불이 가진 온도의 높낮이는 곧바로 어떤 작품이 지니는 가치의 높낮이를 결정한다. _본문 118~119쪽
내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씨에게 바라는 것도 결국 시적 정신이다. 「문신」의 다니자키 씨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진정 사랑한다면」의 다니자키 씨는 불행히도 시인과 거리가 멀다. “위대한 친구여, 그대는 그대의 길을 가라.” _본문 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