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빛비즈
번역서
절판
마음껏 먹고 요리하는 기쁨
갖가지 식재료가 그대로 이야기가 되다
애틋한 추억과 요리 잡학이 엮은 미각방랑기
일본 문단 최고의 미식가로 알려진 단 가즈오.
그는 세계 곳곳을 두루 다니며 맛보고 체험한 요리를 손수 만들어 지인에게 대접한 것으로 유명하다. 단 가즈오에게 요리는 결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요리를 대접받은 이들은 다자이 오사무, 사카구치 안고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었다. 특히 다자이 오사무는 단 가즈오와 도쿄대학 동기로 함께 술을 마시며 우울한 시절을 달랬다.
봄부터 겨울까지, 틈만 나면 그 계절에 제격인 먹을거리들을 찾아 쏘다니는 모습은 또 어떤가. ‘가끔씩 소설도 쓰는 요리 선생’이라는 핀잔에 무리가 없다. 읽고 있으면 슬슬 배가 고파지는 책이 진짜 요리책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 책이 그렇다. 봄 향기 가득한 산나물과 무럭무럭 연기 오르는 양고기를 글맛으로 활짝 펼쳐 보인다. 단 가즈오는 나오키상과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진짜 백미진수는 식탁의 흥취를 돋우는 그의 문장인지도 모른다.
맛의 진수를 찾아 산으로 들로
내가 먹을 음식은 내가 만드는 요리 인생
단 가즈오는 비교적 일찍 요리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어머니가 집을 나가 버리자 단 가즈오가 세 여동생을 포함한 가족의 식사를 담당하게 된다. ‘자기가 먹을 음식은 자기 스스로 만드는 요리 인생’의 시작이었다. 전시 중 보도반원으로 중국에 있을 때조차 미식의 방랑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평생 맛 찾기를 포기한 적이 없다.
이때부터 나의 요리 만들기는 시작됐다. 아니, 그보다 ‘자기가 먹을 음식은 자기 스스로 만드는’ 요리 인생이 열렸다. 그랬더니 이토록 맘 편하고 이토록 유쾌하며 이토록 확실히 끼니를 챙겨 먹을 수 있는 생활이 없었다. 산에 나는 고사리, 백합 뿌리, 버섯, 참마…… 산속을 조금 서성거리면 갖가지 맛난 식재료가 땅에 그득하다는 사실도 배웠다. _10쪽
단은 자조 섞인 말투로 “어머니가 가출한 탓에 어쩔 수 없이 어린 시절부터 요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지만, 아내가 생기고 자유로이 외식할 수 있는 돈이 생겼음에도 여전히 그는 누군가를 위해 부엌에 섰다. 단의 마음속에는 ‘누군가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다’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단의 장남이 쓴 후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이곳저곳을 두루 뛰어다니며 재료들을 모으고 정성껏 요리를 만들어 대접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 그 기쁨은 어떤 것이었을까?
경묘한 문장, 풍부한 음식 체험, 깊은 인간성
삼박자를 갖춘 글의 맛
사카구치 안고는 말한다. “단 가즈오, 자네가 요리에 열중하는 것은 미치지 않기 위함 아닌가. 그러니 더욱 정진하게.” 낙천적인 성격으로 알려진 단이 미치지 않기 위해 요리를 했다니, 그때나 지금이나 산다는 것은 다 어려운가 보다. 대체로 무언가에 미쳐 있을 땐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요리는 다르다. 미쳐 있음에도 누군가를 위하는 방법이 될 만하다. 단 가즈오가 요리를 하는 이유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누군가와 함께 먹기 위해서이니까. 그는 결코 고독한 미식가가 아니다. 단 가즈오의 미식 방랑에 동참한 친구 가운데는 『인간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도 있다.
다자이 오사무와 나는 졸업할 가망이 별로 없는 도쿄대학 오학년, 사학년. 손에 쇠파이프만 안 들었다 뿐이지 마음속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서 야스다 강당에서 산시로 연못 언저리로 나가 담배를 마구 피워대며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연못 수면에 비치는 빛이 그 색깔을 완연히 잃으면 갑자기 되살아난 것처럼 벌떡 일어나 택시를 타고 약속이라도 한 듯 다마노이로 달려갔다. 사방에 울퉁불퉁한 싸구려 거울을 둘러친 기괴하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잔술집으로, 기본 안주에 반드시 바지락 소금국이 곁들여 나왔다. 이 바지락 소금국을 훌쩍이면서 진탕 퍼마시는 것이 우리의 서글픈 규칙이었다. _42쪽
어때요, 맛있지요?
내가 만드는 요리는 세상을 두루 돌아다녔으니 천하일품일걸요!
여행지에서도 단 가즈오는 때때로 단 가즈오의 요릿집을 연다. 외국 여행 시에는 되도록 주방이 딸린 방을 찾지만, 주방이 없어도 상관없다. 호텔의 화장실이나 욕조 어디든 단 가즈오만의 주방이 될 수 있으니까. 책을 읽다 보면 한껏 들뜬 단 가즈오가 욕조에 물을 받아 채소를 씻고 생선을 손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음성은 한결같다. “어때요, 맛있지요?”
여행지에서 다양한 음식을 먹고 마시고 요리하는 일은 무척 즐겁다. ‘먹고 마시고 만드는’ 이 진정한 즐거움을 모르면 여행은 생각 외로 따분한 법이다. 곧잘 해외에서 “역시 마누라가 끓이는 된장국이 최고야”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순전히 교제를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리라. _1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