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철의 조화로운 융합, 한 권으로 채우는 인문학의 힘
인문 교양을 쌓기 위해서는 기초 체력이 필요하다!
인문학 열풍으로 공주들도 떴다. 여기서 공주는 왕자를 기다리는 성 안의 공주가 아니다. ‘공부하는 주부들’의 약자다. 입학을 위해서도, 취업을 위해서도 아니고, 살림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들은 어려운 인문학 공부에 뛰어들까? 가정에 매여 어느 순간 희미하게 사라진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서다.
인문학은 삶을 위해 절실하다. 그 삶이라는 게, 입학시험이나 취직시험, 승진시험처럼 구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간절하여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쥐락펴락하는 ‘일상의 문제들’이다. 나는 왜 불안한지, 타인은커녕 나조차도 왜 나 자신을 이해 못 하는지, 삶이 왜 허무하고 죽음이 왜 두려운지, 사랑은 왜 끝나고 마는지, 왜 돈과 시간에 허덕이며 살아야 하는지 등등 너무 커다란 문제 같지만 사실은 일상을 뒤흔드는 질문들을 위해 인문학은 절실하다. 그래서 입학을 준비하는 사람도, 취업이나 승진을 염원하는 사람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먼저 알기 위해 인문학 ‘지식’이 아니라 인문학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회는 지식을 도구로 삼으라고 압박하지만 지식은 도구가 되지 않는다. 낱낱의 재료일 뿐이다. 그것들을 씨줄 날줄로 엮어 진짜 삶의 도구로 만들어내는 것은 제 스스로 인문학적으로 생각하는 힘이다. 면접관이든 사장이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지식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당신의 ‘시각’을 물을 뿐이다. 인문학 지식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것을 자기 삶으로 어떻게 끌어오는지 보고 싶어 한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문학적으로 생각하고 삶에 질문을 던지는 태도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인문학에 대한 기초 체력을 키워야 한다.
삶의 변화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진짜 인문학의 힘
일상 속에 인문학이 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삶의 문제들이 해결될까? 인문학은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문제를 풀어나갈 역량을 키워준다. 이것이 인문학 지식을 단순히 암기식으로 습득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혹실드의 《감정노동》을 텍스트로 읽고 외워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런 사람은 아이를 돌보는 그림에서 부모의 사랑이라는 단편적인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 부모의 사랑 같은 본능적인 문제에 무슨 인문학을 들이대느냐고 묻는다면 ‘중2병’으로 반항하는 아이와의 갈등, 아이에 대한 복잡 미묘한 부모의 감정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버린다.
인문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속에서 육아와 모성애라는 키워드를 찾고, 부조리한 사회로 연결하며, 에리히 프롬의 소유하는 삶과 존재하는 삶으로까지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그런 후에 자녀에 대한 태도가 바뀌고, 자신의 삶이 변화될 가능성이 발견되는 것이 인문학적 사고의 힘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인문학이 일상 가까이에 있다고 강조한다. 인문학에 가장 친근하게, 그리고 가장 빨리 접근하는 방법은 일상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밀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식을 습득하려고만 하지 말고 의심을 통해 질문을 던지면 인문학적 상상력을 가질 수 있다고. 그래서 일상과 인문학을 자연스럽게 엮어낸다.
언제까지 그저 소비하는 인간, 노동하는 인간, 게으름을 죄악으로 알고 휴식을 즐기지 못하는 인간, 돈에 쫓기고 돈만 좇는 인간으로 살 것인가? 이런 삶에서 과연 인문학의 단편적인 지식들이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인문학적으로 생각하면 세상을 똑바로 보고 살아가는 힘이 생긴다. 인문학을 삶에 현실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다.
인문학 입구에서 망설이다 번번이 포기했던 사람,
인문학 지식을 외워도 구멍 난 독에 물 붓는 듯해 허탈했던 사람,
도대체 인문학을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사람,
그럼에도 여전히 인문학 공부가 숙제처럼 남은 사람을 위한
살아 숨 쉬는 인문학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지만 여전히 인문학 지식들을 암기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인문학 공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지식의 나열은 어렵고 고단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여전히 질문이 남는다. 대체 인문학을 공부해서 어떻게 써먹으라는 거지?
우리에게는 삶에 생생하게 작용하는 인문학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인문학의 분야들을 차례차례 섭렵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인문 고전 지식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와 서로 융합하며 삶에 녹아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의 문제들과 부딪혔을 때, 사람이 이해되지 않을 때, 문득 아무것도 하기 싫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때, 삶이 힘들고 고독하게 느껴질 때, 적절한 질문과 답이 머릿속에 떠올라야 한다.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중심으로 인문학에 접근한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렵기만 했던 인문학에 대한 기초 체력이 생길 것이다.
책 속으로
인문학은 일상의 삶에 밀착해 있다. 일상과 분리된 인문학이라면 신기한 화석에 불과하다. 기원전 플라톤, 혹은 수백 년 전 근대 사상가의 글이 현재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직접 관련이 없다면 박물관에서 만나는 낯선 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뽐내는 수단일 뿐이다. 인문 고전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현실에서 절실한 인문학적 사유와 다양한 문제의식을 담뿍 지녔기 때문이다.
_저자의 말 <인문학 입구에서 망설이는 그대에게>
흔히 일상생활의 문제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 그래서 철학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 이에 비해 철학이나 학문은 순수하고 고귀한 정신의 산물로 치켜세운다. 철학은 복잡하고 사소해 보이는 일상생활과는 달리 고도의 정신적·추상적 작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겪는 일은 하찮고 사소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일상은 철학에 의해 버림받은 채 짜증나는 반복 속에 내팽개쳐 있다.
인문학이 뿌리를 내려야 할 일상이 관성과 기계적 작용에 머물러 있게 되면서 인간은 생활의 주인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현대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에 포위당해서 꼼짝달싹 못한다. 일상성의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비판적인 문제의식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결과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가진 영향력은 실체 없이 희미한 상태에 머문다.
(...)
인문학과 일상이 분리되어선 안 된다. 만약 인간의 생활과 무관하게 철학이 그 자체로 존립하려 한다면 생명력이 사라질 것이다. 일상에서 분리된 인문학은 자신의 근거를 상실하고 화석처럼 굳어져버린다. 실제 삶과 무관한 철학이라면 자기만족적인 것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인간에게 실천적인 의미를 줄 수는 없다. 일상성 속에 사회의 비밀이 숨어 있기에 그 비밀을 파헤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일상에 대한 관심이 그저 사소하고 잡다한 개개의 사건과 사례에 현상적으로 머물러서도 안 된다. 이러한 접근은 단지 일상에의 매몰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평범하고 관성적인 눈으로 일상을 본다면 일상의 늪으로 더 빠져든다. 르페브르는 “일상 속에서 살며 일상을 체험하되, 일상을 수락하지 말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일상에 주목하되 일상의 이면에서 현상을 만들어내는 본질을 추적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를 통해 인문학과의 만남이 성사된다.
철학의 눈으로 일상생활을 분석하고, 사소해 보이는 현상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근본적 요소를 찾아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실천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철학과 일상 사이의 만리장성을 허물어야 한다.
(...)
부모의 자식 사랑이라는, 아무런 고민이나 논의가 필요 없을 것만 같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현상에서도 인문학적 사고로의 확장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아니, 오히려 일상에 밀접하면 밀접할수록 더욱더 인문학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만약 우리의 실질적인 삶과 관련이 없다면 죽은 인문학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인문학에 가장 친근하게, 그리고 가장 빨리 접근하는 방법은 일상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일상에 밀착하는 일이다. 다만 일상에 완전히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일상 안에 있되, 통념에 머물기보다는 비판적 문제의식과 상상력을 통해 인식을 확장할 때 가능하다.
_<인문학은 생활이다> 중